길을 걷다 갑자기 끝없는 반복형 노래의 대명사가 하나 생각났다. 아침에 듣거나, 갑자기 떠오른 노래 한곡이 하루종일 입가에 맴돌아 사람을 귀찮게 할때가 있는데, 오늘 내 노래는 바로 이 것. "타잔이 10원짜리 팬티를 입고, 20원짜리 칼을 차고 노래를 한다. 아아아~" -.-;;;;;;;;
날씨도 스산하고, 찬 바람도 불고,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이런 날에는 왠지 구슬프거나, 심금을 울리는 노래가 입가에서 흘러나와야 제격일 듯한데, 어쩌다 '타잔의 10원짜리 팬티'가 떠오른 것인지, 만나는 사람마다 아침을 잘못 먹었냐고 묻는다. '가끔보면 네 뇌를 열어보고 싶어'라던 친구의 말에 공감하고 있는 하루.
그런데..정말 타잔은 팬티를 입었을까? 그게 사실이라면 타잔은 대체 '왜' 팬티를 입었을까. 소위 '미개인'의 예를 들어, 팬티(혹은 그와 비슷한 무언가)를 입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들의 모습이 우리의 눈에는 '미개'한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원시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문화에 등급을 매길 수 있다고 백만번 양보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지니고 있는 문화의 본질은 우리의 것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이미 충분한 '집단'을 형성하고 있고, 그 집단을 유지시키기 위한 문화를 가지고 있으니, 그들이 아랫도리만 대충 가리는 옷을 입었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선악과를 먹자마자 인간이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이 '(벌거벗은 것에 대한) 수치'를 느낀 것이라는 성서의 얘기는, 그래서 최초의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 기억으로는 제인이 처음 본 타잔의 모습에 대한 구절이 소설 속에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배우를 벌거벗겨 내놓을 수는 없었을 테니, 어쩌면 단순히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겨난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 애니메이션으로 나왔던 타잔은, 무슨 기술이 어떻게 들어갔고, 제작비가 얼마고 하는 시끌벅적했던 광고와는 무관하게, 개봉후 한참이 지나서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간 보아왔던 기존의 흑백 영화 타잔에 비해 이 애니메이션에 강한 인상을 받은 건 이런 장면들 때문이었다.
보는 내내 눈을 뗄 수 없었던 (진작에 이렇게 그려졌어야 했던) 타잔의 꺽인 손. 직립보행에 이상화된 이런 발로 나무를 움켜쥘 수가 없어 고생하는 어린 시절의 모습.
혼자서도 언어를 익혀 난생 처음 보게 된 '인류'와도 거침없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혼자서도 도구와 두뇌를 '인간답게' 사용하여 모든 동물을 지배했다는 '밀림의 왕자 타잔'보다는 이게 더 타잔의 본래 모습에 가까운 게 아닐까.
'밀림의 왕자 타잔'이라는 이름에는 이 소설이 탄생한 20세기 초반의 사회적 배경이 너무 강하게 담겨있어 거부감이 생긴다.
* 몇 해전 같이 공부하던 학생들과 타잔을 놓고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인간 이외의) 동물은 사고할 수 있는가'가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내 화두(?) 중에 하나였는데, 그런 이야기를 뒷받침할만한 내 지식도 턱없이 부족했고, 함께 이야기한 학생들이 대부분 인문학 전공들이었던 지라 사용한 개념이나 주장이 추상적인 내 주장 못지 않게 관념적이었다.
무슨 이야기 중간에 타잔의 얘기를 꺼내게 되었는데, 유인원의 손에서 자란 타잔이 독학으로 글을 깨우치는 것이 과연 가능했겠냐는 데서 격론이 오갔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줄거리에 의하면, 타잔은 부모의 집에 남겨진 아동용 책을 통해 글을 배웠고, 이것을 이용해 제인 일행과 의사소통을 했다. 거처에 남겨진 메모를 보고 이 섬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고 믿은 제인 일행은 타잔과 처음 마주친 뒤 그가 '훌륭한 영어'를 쓸 줄 알면서도 말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놀라움과 흥미를 보이게 된다. 물론 타잔에게 말을 가르친 것은 제인이다.)
내 주장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언어를, 사고를 위해 사용하는 언어와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로 굳이 나눈다면, 인간 이외의 동물, 특히 인간에 가까운 유인원은 최소한 두번째 의미로서의 언어를 습득하고 사용할 수 있는 생물학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추상적인 어휘와 상징에 대한 이해인데, 만일 유인원이 어떤 상징을 사용할 수 있고, 그것을 자신들의 의사소통 수단(이 경우에는 특정한 소리나 행동 조합)을 가지고 표현할 수 있다면, 그 속에서 '학습하며' 자란 타잔이 인간의 언어를 스스로 깨우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예컨대, 호랑이가 무리에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호랑이 흉내를 냄으로서 호랑이의 접근을 알리는 것 혹은 '호랑이!'라고 외치는(보여주는) 것과 '위험!'이라고 외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내 주장은 유인원 정도의 두뇌라면 '위험!' 정도의 의사소통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고, 따라서 그 속에서 자란 타잔도 그 정도는 습득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비록 타잔이 인간의 모든 어휘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상징'의 사용을 학습하여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를 독학으로 익힐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다만 이때 문제가 되는 건, 타잔이 말보다 글을 먼저 익혔다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나로 반론할 방법을 모르겠다.
위험한 상황이란 게 무엇인지는 문화적 배경 및 직접 경험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위험' 그 자체를 전달하는 것은 인간만의 고유 능력이 아니라는 게 내 주장의 요지였는데, 가젤의 스토팅을 운운하며 이 주장을 이어가기에는 사실 내가 생각해도 좀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나에 비해 반론은 거세면서도 나름 논리적이었는데, 일단 동물은 '사고할 수 없고' 그들의 행동은 '본능적'이라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런 동물 무리속에서 자란 타잔이 다른 인간을 전혀 만나보지 못한 상황에서, 언어 사용에 있어 가장 중요한 '추상과 (합의에 의한) 기호'의 이해라는 기본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리가 없다는 것. 즉 언어란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타잔은 결코 혼자서는 언어를 습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재로 있었던 일이라고 알려진 인도의 늑대소녀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인간 집단과 유리된 채 성장한 인간은 언어나 사고를 위한 기본 능력을 (관계를 통해) 충분히 발달시킬 기회를 박탈당하기 때문에, 언어를 포함한 인간의 문화, 그리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100% 후천적이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다른(?) 생각을 했다. 그런 능력의 상당 부분(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모르겠다)이 후천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동물에게도 분명 어느 정도의 학습 능력이 있고, 이따금씩 영장류 연구에서 발표되는 유인원류의 학습 능력은 인간의 이전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인 경우가 많다. 타잔이 어느 정도까지는 언어를 독학으로 익힐 수 있었으리라 믿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분명 어느 정도의 추상적인 어휘-'어휘'라는 말이 영 꺼림직하다면 '소리 및 행동 조합'-를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 유인원들 속에서 타잔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늑대 소녀들이 보였다는 늑대스러움은 결국 그 아이들이 '학습'을 통해 익힌 것이며, 따라서 유인원 속에서 자란 타잔도 굽어진 손뿐이 아닌 사고와 판단의 어떤 흔적을 학습했을 것이라는 것.
요약하자면, 동물은 '동물일 뿐'이라는 주장과, 동물은 인간이 (자만심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거나 본능적이지만은 않다는 내 주장이 부딪힌 것인데....그들의 단언적인 표현에 비해 나는 주로 '믿는 것'들을 근거로 사용했기 때문에, 내 주장은 여지없이 공격당해버렸다.
덧붙임) 이 토론 중간에 곁다리 식으로 살짝 지나간 이야기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건 타잔이 제인 일행을 처음 본 순간에 대한 것이다.
과연 타잔은 제인 일행을 처음 본 순간 자신과 같은 '종'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까? 타잔은 어떤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리고 자신이 익힌 어떤 체계(언어)가,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라는 것, '이렇게 생긴 종'들 간에 오가는 의사소통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타잔 하나를 놓고 참 많은 이야기가 오갔는데, 그 대부분이 여전히 의문부호와 함께 남아있다.